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창 폭동 (문단 편집) == 배경 == [[국민당의 1차 북벌]]이 한창이던 1927년,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청당에 들어갔다.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는 [[국공합작]]을 유지했으나 [[마일사변]]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 장교들의 반공 폭동이 이어지고 공산당이 직접 국민당 좌파와 연합하여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회를 장악, 개조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군대를 조직하며 우한의 우파 장교들을 처벌하라는 스탈린의 '5월 지시'가 내려오는가 하면 우한 정부가 믿었던 [[펑위샹]]이 장제스와 동맹하여 분공을 요구하자 결국 왕징웨이는 7월 15일 [[국공결렬]]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에 공산당은 [[1927년]] [[7월 13일]], 선제적으로 국민정부 탈퇴를 선언하고 지하로 숨어들어 국민당[* 아직까지 공산당은 국민당에 가입된 상태였으므로 아주 엄밀하게 말하자면 국민당 '우파'.]에 대한 복수를 위한 무장봉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국공합작]],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서산회의]], [[중산함 사건]], [[국민당의 1차 북벌]], [[난징사건]], [[4.12 상하이 쿠데타]], [[국공결렬]], [[영한합작]] 문서 참조.] 난창은 인구 12만의 소도시지만, 장시 성의 수도이며 장제스가 일시적으로 이곳에 천도를 주장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도시였다. 마침 우한 국민정부의 [[탕성즈]]는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를 상대로 한 동정을 실시 중이라서 제2방면군 총사령관 [[장파쿠이]] 등이 구강과 난창의 1선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런데 난창에 주둔한 상당수의 부대들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언제든지 폭동에 동원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무장봉기를 일으키면 국공합작과 혁명에 찬동하는 국민당 좌파들과 노동자, 농민들이 이에 호응할 것으로 기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